◆ 사고파는 것 vs 주고받는 것
이 세상의 기본적인 경제 원칙은 '사고파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기본적인 경제 원칙은 '주고받는 것'이다. 주고 받는 것은 무조건적인 은혜의 표현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줄 때 반드시 다른 것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파는 것은 반드시 교환이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사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존재인 돈'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그냥 준다면, 우리는 돈을 '은혜'와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돈에 대한 우상을 없애고, 영적 세계와 자연 세계 모두에게 맘몬은 우리의 공급자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다시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며 헌금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인 결핍에 처해 있다면 재정을 심어서 거두라는 가르침을 나는 백 번도 넘게 들었다. 이것은 정말로 '틀린' 말이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세상적인 교환 체제에 다시 속하게 만들고, 실제로는 맘몬의 영에 의해 다스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 참새 믿음
예수님은 마태복은 6장에서 심고 거두는 원칙은 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4~28
예수님은 참새와 백합이 심거나 거두거나 수고하거나 길쌈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그들은 자신이 수고한 일 덕분에 공급받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들을 귀하게 여기시기에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새나 꽃보다 사람은 얼마나 더 귀히 여기시겠는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쓸 것은 하늘 아버지가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워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나는 '참새 믿음'이라고 부른다.
참새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모든 경제 활동의 초석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는 기본적인 신뢰인 이 참새 믿음이 없이는, 다른 성격적 재정원칙들은 맘몬의 영에 의해 쉽사리 왜곡되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받을 것을 기대하며 재정적으로 심고 거두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물론 아니다!
심고 거두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원칙이지만, 이는 나의 필요를 채움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종종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우리가 행하는 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다.
'참새 믿음'은 절대적인 신뢰이자 확신이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을 나의 존재를 드려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에 근거한다면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공급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장소를 알라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이 나의 공급자시라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은혜로 나의 쓸 것을 자동적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직장을 그만두고 주님이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리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물질을 공급하시는 장소와 통로를 알지 못해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이제 엘리야의 삶을 함께 살펴보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왕상 17:2~6)
엘리야의 삶에서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사실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받았다. 그는 무신론자와 같이, 돈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공급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동일한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현재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통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 17:7~9)
시내의 물이 말랐을 무렵, 엘리야는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이 공급의 통로를 바꾸신다는 사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급의 통로가 마르게 되면 즉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때에 맘몬의 영에게 사로잡혀 잠시 무신론자처럼 되어, 자신의 힘으로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미친듯이 애를 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공급의 장소와 통로가 여러 번 바뀔지라도, 공급자는 언제나 동일하심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의 통로가 바뀌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이상 주님과 안정된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나엔게 질문을 했던 형제가 '참새 믿음'이라는 명목 하여 무작정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의 공급을 기다렸다면, 그는 현재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장소로 떠나야 한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장소와 통로를 깨닫는 것은 이토록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왕상 17:10~16에는 가루 한 웅큼과 병에 조금 남은 기름으로 본인과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사르밧 과부가 나온다. 그 과부에게 엘리야는 그것으로 먼저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라고 한다. 과부가 엘리야가 시키는대로 하였더니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그녀의 밀가루와 기름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 과부는 엘리야가 하라는 대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 과부는 물질적인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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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결핍에 처해 있다면 재정(헌금)을 심어서 거두라는 식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이 맞는듯 하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런데 딱 틀린 말이라 해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심었으면 거두게 될 것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고 성경적인 원칙이지만,
나는 나의 필요를 채움 받기 위해 도박에 판돈을 걸듯이
이렇게 하면 채워질까 저렇게 하면 채워질까 하며 하나님께 보상을 바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 행위와 수고로 보상 받을 것은 없다!
그저 날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행위로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좀 자유해진 것 같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와 같은 믿음은... ㅠ.ㅠ
마지막 남은 것을 주어버리면 자식 먹일 것이 없어질텐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믿음의 사람에게 먼저 주라고 하면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채워주실 것을 알면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못 주겠다는 말은 뭐냐? 할 수도 있겠다.
이건 이런 느낌이다.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면서
"그거 엄마도 좀 줘 봐." 또는 "친구랑 나눠먹어라."하고 말했는데
선뜻 주지 못하고 손에 꽉 쥐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이 엄마가 먹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이에게 장난걸고 싶어서, 혹은 나눠 먹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말한 건데
아이는 과자가 없어진다는 것이,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선뜻 주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 것이라 주장하고 싶고,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에 멈칫거리게 한다.
사랑받는 것은 알겠는데, 내 것을 선뜻 내어드리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선뜻 내어드리지 않아도 자식이라 사랑하시는데
선뜻 내어드리는 마음은 얼마나 더 기뻐하실지..
내가 내 자녀를 키우면서도 그 마음을 알겠는데
하나님이 내게 뭔가 취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아직 나는 내 것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을 내 손에 꽉 잡고 있는 수준이다.
사르밧 과부처럼 물질적인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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